서문

25년 하반기에 AI 에이전트를 처음 접했다. 당시에 간단한 싱글셀 분석을 할게 있었는데 데이터의 위치를 알려주고 공동연구자에게 받은 배경을 설명해주었다. 30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분석결과를 들고왔다. 분석 프로그램 설치부터, 분석, 그리고 논문에 들어갈 그림까지 굉장히 빠른 시간에 거의 정확하게 분석을 해냈다. 그때 기분은 마치 자다가 외계인 우주선에 납치되어 화성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겨울 내내 에이전트를 다루면서 많은 작업을 했다. 인생에서 이보다 짜릿한 순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당시에 에이전트를 구축하거나 바이브 코딩을 하는 사람들이 남긴 SNS의 글을 보면서 여러가지 방식들을 시도해봤다. 그때, OpenAI의 창립 멤버인 안드레이 카파시 (Andrej Karpathy)의 글을 많이 보게 되었다. 카파시의 글과 인터뷰는 마치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길 같았다.

2026년 4월에 카파시가 그의 깃헙 gist에 짧은 제안 하나를 공개했다. 바로 LLM-Wiki라는 개념이다. 이름이 다소 단순하고 아저씨 같지만 내용을 살펴보면 더 단순하다. 질문이 들어올 때마다 원자료 조각을 다시 찾아 답을 합성하는 대신, LLM이 지속적인 Markdown 위키를 미리 만들고 갱신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원자료는 고치지 않는 층으로 두고 위키는 LLM이 소유하며 구조와 규칙은 사람과 LLM이 함께 발전시킨다. 이것을 굉장히 간단한 규칙문으로 gist에 올려두었고 이러한 규칙을 바탕으로 작업하면서 유저는 지식과 근거의 원천으로 사용한다. 에이전트를 다루는 카파시의 방식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방식을 연구에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서 학위를 시작할 때를 생각해보자. 논문을 읽고 또 논문을 읽는다. 석사 첫 학기에 대략 30편 정도의 논문을 읽었던 것 같은데 그때 읽은 논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학위 주제를 만드는 방향을 제시한다. 나의 석사 학위는 오래전이지만 그때 수집되고 정제된 지식이 계보를 이루어 지금의 나라는 연구자를 규정한다. 연구자의 모든 연구 활동은 날마다의 기록이 그 사람의 연구적 방향성과 품질을 결정한다. 그래서 카파시 박사님이 말한 LLM-Wiki를 사용하면, 이 과정을 보다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그 제안을 내 연구에 적용해 몇 개월간 구축한 방법을 다루고 있다. 초기의 시행착오와 방법 구축이 있었고 지금 내 LLM-Wiki는 약 5번 정도의 진화를 거쳐, 내 삶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 여러가지 운영 원칙에 대한 노하우를 공개한다.

첫째는 내가 논문을 읽는 방식이다. 한 학기를 쓰고 나니 사용 빈도와 만족도가 계속 늘었다. 논문을 들일 때는 두 가지 방식을 나눠 쓰는데 하나는 읽고 정리해 제자리에 넣는 일반적인 처리이고 다른 하나는 기존 위키와 합쳐 개념을 잇고 새 질문을 뽑아내는 데까지 가는 처리다. 뒤의 것은 시간이 더 들지만 그 논문 한 편이 위키 전체를 조금씩 고친다. 이렇게 쌓이고 나서야 되는 일들이 생겼다. 공동연구를 함께하는 분들의 논문을 모두 찾아 넣고 그분들이 다루는 실험과 기술을 파악해 실험 계획을 짜 보는 일, 오래전 그 분야를 만든 논문들을 모아 서론을 어떻게 열고 고찰을 어떻게 닫았는지 전개 방식을 정리하는 일, 같은 주제를 두고 관점이 갈리는 연구 그룹들의 논문을 나란히 놓아 보는 일이 그렇다. 석사 첫 학기에 서른 편을 읽으며 머릿속에서 하던 일을 지금은 폴더가 대신 붙들고 있어 준다는 느낌에 가깝다. 다만 비용이 실제 문제여서 같은 논문을 연구실의 여러 사람이 각자 처리하면 같은 작업이 반복된다. 그래서 누군가 한 편을 읽으면 정리 결과와 원문을 함께 공유하는 자리를 따로 두었다.

둘째는 학생을 가르치는 방식이다. 지금 학생들이 연구실에 입학해서 하는 연구 주제는 대부분 여러 분야에 걸쳐 있다. 그래서 학생들은 넓은 범위의 지식을 배우고 그것들을 서로 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유전체 연구는 지난 10년 사이 데이터가 쏟아지면서 요구하는 지식의 폭이 넓어졌다. 전산학과 통계학의 방법으로 데이터를 다루는 동시에, 그 관찰로 밝혀진 생물학을 깊은 수준까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처음 연구를 배우는 학생에게는 각 연구가 어떤 흐름에서 발전해 나왔고 그 결과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함께 가르쳐야 한다. 연구자가 되려면 자기 주제를 스스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 주제를 자기 말과 글로 꺼내 놓는 과정이 빨라지니 자신감이 빨리 붙는다. 훈련 과정에서 그것이 틀렸다 하더라도 자기 언어로 풀어내 보는 일은 중요하고 거기서 다음 질문을 이어 붙이는 일은 더 중요하다. 온보딩에서 특히 그렇다. 새로 온 학생은 좋은 논문을 골라내는 일부터 어려워하므로 내가 먼저 중요한 논문을 읽고 주제의 흐름을 파악한 다음 그 결과를 건네는 대신 골라낸 논문들을 건넨다. 정리는 학생이 자기 위키에서 직접 하게 한다. 정리된 문서를 받아 읽는 것과 자기가 정리해 보는 것은 남는 것이 다르고 지금까지 학생을 훈련시킨 방식 가운데 이것이 가장 효과가 좋았다. 이 방식을 처음 접한 분들은 학생이 논문을 대충 읽고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시는데 실제로 써 보면 그 걱정은 크지 않았다.

셋째는 연구책임자로 연구실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사람이 늘고 과제가 늘면 지금 무엇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묻는 일 자체가 일이 된다. 답이 한 곳에서 나오지 않고 메일과 달력과 공유 문서와 메신저에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 도구가 무엇을 소유하는지 정하고 위키는 그것을 가리키게 두었다. 논문을 읽는 위키 옆으로 원고를 쓰는 폴더와 분석을 하는 폴더가 갈라져 나온 것도 같은 이유다. 각각에 폴더 배치와 작업 규칙을 정해 두고 무엇을 왜 바꿨는지를 작업 로그로 남기면, 세 종류의 작업이 각각 자기 규칙과 자기 기록을 소유한다. 사람에 관한 기록도 같은 원칙으로 쓴다. 날짜가 붙은 사실만 쌓고 점수나 등급은 만들지 않으며 오래된 관찰은 현재 상태로 읽히지 않도록 표시가 내려간다. 매일 아침 판단할 것을 모아 주는 자리를 하나 두었더니 흩어진 것을 찾아다니는 시간이 줄었고 그랜트와 행정 서류처럼 형식이 정해진 일에서는 자동화가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정하는 일이 더 중요했다.

이러한 목적을 갖고 사용하다보니, LLM-Wiki는 내가 하는 모든 활동에 대하여, 다시 말해 읽고 정리하고 지식을 체득하는 과정을 계속 이어 갈 구조를 만들어 주었다. LLM-Wiki 사용법에 대한 강의를 하다보면, 수강생들이 자주 하는 질문 (or 걱정?)이 하나있다. AI로 논문을 읽는 것은 클릭 몇 번이고 그렇게 해서는 지식이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부는 맞는 말인데, 꼭 그렇진 않다.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붙는다. AI 에이전트로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내용을 연구자는 적어도 한번은 읽는다. 왜냐하면, AI와 다르게 인간은 그 내면에 깊숙이 패인 어떤 질문에 대한 호기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AI 에이전트와 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 한다. AI는 앞으로 더 발전할 거고 더 정확한 수행을 하는 기계가 되겠지만, 인간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을 과학적 방법으로 풀고자 하는 동기는 인간의 고유한 내면에서만 나온다. 그래서 AI 에이전트나 LLM-Wiki를 사용한 뒤에도, 어떤 질문이 생겨 위키에 물어보는 중에도, 발표를 준비하려고 그 문서를 다시 열어 보는 순간에도, 인간 과학자의 한쪽에는 지식이 반드시 남는다.

이 책은 지난 반년 동안 쓰면서 얻은 경험과 방법을 우리 연구실 학생들을 위해, 커뮤니티의 연구자들을 위해 공유한다. 그리고 갖은 잡무와 국가 발전을 위해 없어져야 할 여러가지 행정문서 올림픽으로 오늘도 고생하시는 교수와 연구책임자들을 위해 바친다. 우리의 삶이 보다 본질적인 질문과 과학을 하기 위해, 그리고 AI 에이전트와 LLM-Wiki가 그런 변화에 씨돌이 되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