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폐를 가진 사람의 삶에서 가족은 대개 가장 중요한 지원 체계다. 공식적인 성인 서비스가 부족한 현실에서, 부모와 형제자매와 배우자가 일상의 지원, 위기 관리, 의료 서비스 연결, 고용 지원을 떠안는 일이 많다. 이 장에서는 자폐를 가진 성인의 가족이 마주하는 현실, 그리고 가족 지원이 어떤 방향으로 발전해야 하는지를 살펴본다.
Hamilton et al. (2024) 연구는 영국에서 16명의 자폐 성인(18~57세)의 친척 18명을 인터뷰한 질적 연구다. 이 연구가 드러낸 가족의 역할은 정서적 동반자에 그치지 않고 훨씬 광범위했다. 일상의 구조 제공(일정 관리, 생활 공간 정리, 감각 환경 조절), 위기 상황에서의 진정(de-escalation), 의료 서비스와의 소통 중개, 복지 신청과 서류 작업, 그리고 아이가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정보 수집이 모두 가족의 일이었다. 연구자들은 이를 “비공식적 케이스 매니저”라 표현했다. 공식 서비스 체계가 마땅히 맡아야 할 역할을, 현실에서는 가족이 빈자리를 메워가며 떠안고 있다.
이 연구에서 가장 강하게 드러난 구조적 문제는 “자율성 역설(autonomy paradox)“이었다. 자폐를 가진 성인이 18세가 되면 법적으로 성인이 되고, 서비스 체계는 그 사람의 자율적 의사결정을 존중해야 한다. 이 원칙 자체는 옳다. 문제는 이 원칙이 현장에서 가족의 배제로 이어지곤 한다는 점이다. 자폐 성인이 복잡한 서비스 체계를 혼자 탐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서비스 제공자가 “성인이므로 본인과만 상담합니다”라는 입장을 취하면, 실질적으로 그 사람은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자율성 존중이 방치로 변질되는 역설이다. 가족들은 이 역설 앞에서 좌절감을 토로했고, 자율성과 지원이 양립하는 서비스 모델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가족이 가장 감정적으로 힘들어하는 주제는 “이후의 문제(what happens next)“였다. 부모가 나이 들거나 세상을 떠난 후 자녀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질문은 자폐를 가진 자녀의 부모에게 가장 근본적인 불안이다. 형제자매가 그 역할을 이어받기도 하지만, 형제자매에게도 자기 삶과 가정이 있으므로 늘 가능한 일은 아니다. 공식 서비스 체계가 가족의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하지 않는 한, 이 불안은 해소되지 않는다.
가족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Hamilton et al. (2024) 연구에서 가족들은 자폐 경험이 있는 역할 모델(자폐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가는 성인의 사례), 지명된 옹호자(nominated advocate), 전담 케이스 매니저, 자폐에 대한 교육을 받은 전문 인력, 활동 안내(activity directory), 저녁과 주말에도 이용 가능한 서비스, 돌봄 제공자를 위한 상담과 위기 전화선, 그리고 필요할 때 들어가고 나올 수 있는 유연한 서비스 모델(step-on/step-off model)을 요구했다. 이 목록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가족이 원하는 것이 고도의 전문 의료 서비스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저강도 지원이라는 점이다.
앞 장에서 다룬 삶의 질 연구의 핵심 발견, 즉 정신건강이 가장 강력한 삶의 질 예측 인자라는 결과는 가족 맥락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Hamilton et al. (2024) 연구에서 면접한 친척 18명 중 3명이 자신도 불안, 스트레스, 우울을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자폐를 가진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과정의 정서적 부담, 서비스 체계와의 끝없는 싸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돌봄 제공자 자신의 정신건강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돌봄 제공자의 건강이 나빠지면 돌봄의 질도 떨어지는 악순환이 생기므로, 가족 지원은 자폐를 가진 당사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를 대상으로 해야 한다.
Kim (2019) 연구에서 발견된 자기 보고와 대리 보고의 차이는 가족 관계에서도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자폐 성인의 자기 보고 삶의 질이 부모의 대리 보고보다 대체로 높다는 것은, 부모가 자녀의 어려움을 자녀 자신보다 더 크게 인식한다는 뜻이다. 이는 부모의 과잉 보호로 이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부모가 자녀의 실제 어려움보다 더 큰 지원 필요를 느끼면서 자원 배분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자폐 당사자의 자기결정과 가족의 돌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일이 서비스 설계의 핵심 과제다.
이 책은 유전체 시퀀싱에서 출발해 분자 기전을 거쳐 여기, 가족과 돌봄의 현실에 닿았다. 유전학이 밝혀낸 것은 자폐가 왜, 어떻게 발생하는지에 대한 이해다. 다만 자폐를 가진 사람과 그 가족의 삶을 실제로 개선하려면, 이 이해가 진단 체계, 의료 서비스, 정신건강 지원, 교육, 고용, 주거, 그리고 가족 지원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에필로그에서 그 번역의 과제를 정리한다.
가족은 많은 경우 가장 가까운 지원 체계이지만, 공식 서비스의 빈자리를 가족이 끝없이 대신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부모가 묻는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되는가”라는 질문은 개인의 불안이 아니라 제도의 질문이다. 형제자매가 미래의 돌봄을 맡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자동적 의무처럼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 당사자의 자기결정은 가족을 배제하는 말이 아니라, 필요한 지원을 받으며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원칙이어야 한다. 가족에게도 상담, 휴식, 위기 대응, 법적·재정적 계획을 함께 세울 권리가 있다. 이 장은 돌봄을 가족의 사랑에만 맡기지 않고, 사회가 나누어져야 할 책임으로 다시 묻는다.
Hamilton, J., et al. (2024). The lived experiences of relatives of autistic adults: A qualitative study. PLOS ONE, 19(2), e0294232. doi:10.1371/journal.pone.0294232
Kim, S. Y. (2019). The experiences of adults with autism spectrum disorder: Self-determination and quality of life. Research in Autism Spectrum Disorders, 60, 1-15. doi:10.1016/j.rasd.2018.12.002